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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왕국시대]

남유다의 역사

글쓴이 : 포토바이블 날짜 : 2014-12-14 (일) 11:17 조회 : 2704
1.남유다의 수난(기원전930-910년)
 북이스라엘의 분열로 유다는 국토의 3/4을 잃고 그것도 초라한 땅만을 차지하였다. 그래서 유다와 베냐민 자손은 북국 정벌을 꾀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북국정벌의 실패를 계기로 국방을 튼튼히 하려고 했다. 이때 애굽왕 시삭이 유다를 침입하여 유다 뿐 아니라 북이스라엘과 블레셋까지 손을 뻗혔다.(왕상14:25-28,대하12:9-12) 르호보암 후에 아비야는 별로 한 일이 없었다.

2.부흥(기원전910-850년)
 아비야의 뒤를 이은 아사는 유다의 몇 명 안되는 선왕으로 애굽왕 시삭의 후계자 세라의 침입을 막고 북이스라엘의 준동을 다메섹왕 벤하닷의 원조로 라마성을 구축한 이스라엘왕 바아사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이렇게 해서 상당히 견고한 국력을 여호사밧에게 물려주었다.
 앗수르와 수리아의 세력을 대항하기 위해 북이스라엘과 친교를 느낀 여호사밧은 자기 아들로 하여금 아합의 딸 아달랴를 아내로 맞이했다. 이리하여 베니게, 이스라엘유다는 모처럼 피차 공존하며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기원전 853년경에 일어난 칼칼전투 후 여호사밧은 아합을 도와 수리아를 쳤으나 이 싸움에서 아합은 전사하고 여호사밧은 본국으로 돌아왔다.(왕상22장) 여호사밧은 또 블레셋과 아라비아 사람들로부터 많은 조공을 받으며(대하17:11) 국권을 튼튼히 했다.(대하20:1-30) 이때의 제판제도는 가장과 장로들이 가졌던 재판권(창38:24,출18:13)이 점차 왕과 관리로 옮겨졌다.(삼하15:2-6, 왕상3:9-12, 대하19:6-11참조)

3.혼란(기원전850-780년)
 여호사밧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여호람은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그의 동생과 그를 따르던 무리를 죽였다.(대하21:1-4) 이같은 혼란이 생기자 에돔은 유다로부터 독립을 하였고(왕하8:16-24) 블레셋, 아라비아의 침입으로 왕자와 왕비와 많은 재물을 빼앗겼다.(대하21:16-17) 결국 여호람은 병사하고 막내 아들 아하시야가 22살의 젊은 나이에 등극하여 1년간 다스리면서 자기 삼촌되는 이스라엘왕 요담을 도와 길르앗라못에서 수리아왕 하사엘과 싸우다가 부상을 당했다.(왕하8:25-29) 이때 북이스라엘에 예후가 일어나 반란을 일으켜 병문안을 하고 있던 아하시야와 요람을 죽였다.(왕하9:14-28) 이에 유다에서는 아달랴가 일어나 왕의 씨를 진멸하고 스스로 여왕의 자리에 올랐으나 여호세바의손에 구출된 요아스가 제사장 여호야다의 도움으로 아달랴 통치 7년에 왕위에 올랐다.(왕하11:1-16)
 7살에 왕위에 오른 요아스는 사실상 제사장 여호야다의 섭정 밑에서 올바른 정치를 펼쳤다. 그러나 여호야다가 죽자 요아스와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제사장의 아들 스가랴를 죽였다. 이때에 수리아의 하사엘은 유다를 침공하였고 요아스는 뇌물과 공물로 안일을 꾀하였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은 신복은 요아스를 죽였고 아마샤가 그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아마샤는 왕이 되자 곧 선왕의 살해자를 죽이고 에돔 정벌에 승리를 거둔 후 교만하여 북이스라엘에 도전했으나 북이스라엘의 요아스(남유다와 동명이인)에게 도리어 패퇴하여 겨우 생명만을 유지하여 돌아와 반대당에게 살해당했다.(왕하14:17-22)

4.흥성(기원전780-730년)
 이웃나라의 국력 약화로 유다의 웃시야와 요담은 권력과 번영에 있어 전성기를 누렸다. 이리하여 기원전8세기에 유다는 전에 없던 부귀와 강성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교만해진 웃시야는 하나님의 법도를 어기고 문등병에 걸려 나라는 요담의 섭정으로 당분간은 유다의 번성을 이어나갔다.(왕하15:1-7)

5.고통(기원전730-721년)
 웃시야와 요담 때의 유다 번영은 애굽의 세력 강화를 막고자 이스라엘 베가왕 다메셉 르신의 연합에 동조하지 않음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스라엘과 다메섹은 연합 전선 구축에 합하지 않은 유다를 쳐서 예루살렘까지 육박했고(대하28:1-7) 에돔 족속은 아가밧 지대를 유다로부터 빼앗았다.그리고 블레셋 역시 전에 잃었던 도시들을 유다로부터 되찾았다. 이에 아하스는 더 견디지 못하고 앗수르왕 디글랏빌레셋에게 금품을 보내 원조를 요청했는데 이때 이사야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라고 외쳤다. 그러나 이사야의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은 외세(애굽, 다메섹, 이스라엘)의 침략에 대해 앗수르 덕분에 화는 면했으나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셋 밑에서 많은 조공과 앗수르의 우상종교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때 이사야와 미가 선지자가 하나님을 섬길 것을 외쳤으나 나라의 대세를 막지는 못했다.

6.고립(기원전년721-640년)
 앗수르의 간섭 밑에 있는 유다왕 아하스가 죽고 히스기야가 왕이 되자 그는 곧 부패된 우상종교를 제거하고 그때까지 섬기고 있던 모세의 놋뱀을 부수고 성전을 정결케하는 종교개혁을 단행했다.(대하3:1-21) 그러면서도 앗수르에게 못마땅한 조공을 바쳐야만 했다. 이때는 이미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살만네셀5세와 사르곤 2세에 의해 멸망되어서 유다는 방대한 앗수르의 세력 앞에 고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침략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왕하20:20,대하32:30) 포위를 대비하여 못과 우물을 팠는데 이때 판 우물로 인정되는 실로암 수도가 1911년에 파커 대위에 의해 발견되었다. 히스기야의 예측대로 앗수르는 침략을8 시작했고 사르곤2세도 애굽 제25왕조의 충동을 받아 블레셋을 치고 유다를 한번 더 굴복시켰다.(사20:1) 이때 히스기야는 병에 걸려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이렇게 완쾌된 히스기야에게 바벨론의 므로닥발라단(왕하20:12,부로닥발라단)은 사신을 보내 유다와 결탁하여 앗수르를 칠것을 종용했는데 이때 히스기야는 그 사신들에게 자기 나라의 모든 보물을 보여준 관계로 이사야선지자에게 심한 견책을 받았다.(왕하20:12,19,사39:1-8)
 기원전701년 사르곤2세가 죽고 산헤립이 왕에 오르는 기회를 틈타 히스기야는 친애굽정책을 펴며 앗수르에 반기를 들어 조공을 그치자 앗수르왕 산헤립은 왕권을 확립한 후 유다와 같이 대항한 시돈과 블레셋을 친 후 유다를 침공해 왔다. 이에 히스기야는 막대한 금품을 주고 구원을 호소하였다.(왕하18:14) 그러나 산헤립은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을 모욕하고 앗수르의 힘을 자랑하자 히스기야는 이사야에게 기도를 간청했다. 이때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앗수르를 두려워 하지말라 그들은 본국으로 돌아갈 것이고 또 그곳에서 죽게 될 것이다.’(왕하19:6-7)라고 하였다.
 그후 앗수르의 산헤립은 애굽 제25왕조 디르하가가 앗수르를 치러 온다는 말을 듣고 히스기야에게 편지를 하여 반란이 일어나도록 했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 일 후의 일은 왕하19:35-37에 기록되어 있다. 그후 신기하게도 산헤립은 생전에 유다를 침입하지 않았고 친척에게 살해된 후 에살핫돈이 앗수르의 왕이 되었다.
 한편 히스기야의 뒤를 이은 므낫세는 부왕이 이루어 놓은 종교개혁을 버리고 다시 우상숭배에 빠졌다가 앗수르왕에게 사로잡혔다가 다시 놓인 후에야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 므낫세의 뒤를 이은 아몬도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고 악행을 저지르다가 그의 신복에게 살해 당하고 8살된 아들 요시아가 대를 이었다.(왕하21:19-26) 그러나 이때의 유다 형편은 앗수르의 에살핫돈과 아술바니팔의 속국에 불과했다.

7.개혁(기원전640-612년)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요시아는 어른이 된 기원전621년에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을 계기로 일대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이 종교개혁은 무언중 앗수르의 반항운동으로 발전했는데 이때 스바냐, 나훔, 예레미야 등의 선지자가 활동했다.
 요시아왕이 집권하는 동안에 300년간 중동을 제패했던 앗수르는 망하고(기원전900-612년) 갈대아(신바벨론)란 새 나라가 일어났다.

8.유다의 여음

(1)멸망(기원전612-587년)
 기원전612년 요시아가 유다를 다스리고 있던 해에 앗수리의 수도 니느웨는 파멸되고 곧이어 애굽의 바로 느고는 유다를 지나 유브라데로 진격해 나갔다.(왕하23:29) 이때 몰려오는 느고의 군사를 막고자 므깃고에 출전했던 유다의 군대는 패하고 요시아왕도 전사했다.(왕하23:29) 이에 유다는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삼아 애굽에 대항했으나 여호아하스는 바로 느고에 사로 잡혀 애굽으로 끌려갔다.(왕하23:31-34,렘22:10-12) 이에 애굽왕 바로 느고는 요시아의 장남 여호야김을 대신 왕으로 삼게 했는데 여호야김은 애굽에 많은 조공을 바치며 백성을 간악하게 통치했다. 예레미야는 그때 상황을 렘22:13-15에 기록하고 있다.
 그때 새로 일어난 갈대아 제국이 갈그미스에서 애굽의 느고를 물리치자 여호야김은 갈대아(신바벨론)를 섬겼다. 그러나 친애굽파의 영향으로 다시 친애굽 정책을 하자 이에 느부갓네살이 기원전602년경 유다를 징벌했고 기원전598년에 굴복하지 않은 유다(예루살렘)을 다시 포위했다. 이런가운데 여호야김은 죽고(아마 전사한듯,왕하24:6) 그 아들 여호야긴이 포위한 갈대아 군에 투항하다가 마침내 보물과 함께 기원전597년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고 말았는데(왕하24:8-17) 이때 포롤 잡혀간 사람들 중에는 선지자 에스겔도 있었다.(1차유배)
 이에 여호야긴은 느부갓네살 통치하에 37년의 감금생활을 하였고 에월므로닥 즉위 때 석방되었다.(왕하25:27-30) 이때 에월므로닥은 여호야긴 대신 21세의 시드기야를 와으로 삼았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의 말대로 바벨론에 충성하여 시돈, 에돔, 모압, 암몬, 두로왕의 사신을 영접할 때까지 의심을 받지 않았다.(렘27:1-11) 그후에도 거짓 선지자의 감언에 속지 않고 계속 에윌므로닥에 충성을 다짐했다.(렘51:59-64) 그러나 기원전588년에 애굽의 새로운 바로 호프라가 일어났을 때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조공을 끊고 친애굽정책을 시도하자 갈대아(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애굽의 응원부대는 느부갓네살 군대에게 패하고(겔30:20-26) 예루살렘을 다시 포위하게 되었는데 이때 예레미야는 반역죄로 감금되어 있었다. 그러나 옥중에서도 아나돗의 땅을 사서 그 땅문서를 바룩에게 맡기는 희망을 보여주면서 바벨론 왕에게 항복하도록 계속 권유했다.(렘38:1-28)
 예루살렘성이 18개월 동안 포위되자 기근과 곤란에 허덕이다가 기원전587년 시드기야는 무너진 한쪽 성벽으로 도망하다 붙잡혀 느부갓네살왕 앞에서 그 아들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본 후 두 눈이 빼어 바벨론으로 잡혀갔다. 이때 유능한 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사로 잡혀 갔는데 그중에는 다니엘도 포함되어 있었다.(2차유배) 그러나 선지자 예Fpal야는 느부갓네살의 후대에 응하지 않고 유다에 거했다.(렘40:1-6) 그후 바벨론은 한달 후에 다시 예루살렘을 훼파하여 유다는 이 땅에서 흔적을 잃고 말았다(왕하25:1-21)

(2)남은 백성(기원전587-539년)
 유다를 멸망시킨 느부갓네살은 그달리야로 유다 지역의 총독을 세워 다스리게 하였다. 그달리야는 예레미야의 조언을 받아들여 그곳 백성들에게 바벨론 밑에서라도 생계를 지켜 나가라고 권고했다.
 그후 암몬땅에서 기원전587년경 이스라엘과 일부 민족지상주의자들은 미스바를 급습하여 그달리야와 유대인, 갈대아인 몇 명을 죽인 후(왕하25:22-26) 이틀 후에 세겜, 실로, 사마리아로부터 오던70명을 죽이고 미스바에 남아 있는 백성을 암몬으로 잡아가려고 했으나 계속된 음모는 결국 실패하고 암몬땅으로 도망했다.(렘40:1-41:18) 그달리야를 죽인 자들은 바벨론의 복수가 두려워 예레미야까지 강제로 데리고 애굽으로 도망했다. 이에 바벨론 군대는 유다에 남아있던 백성을 다시 바벨론으로 끌고갔다.(렘52:30) 한편 애굽으로 끌려간 예레미야는 그곳에서 예언 활동을 하다가 애굽에서 죽었다고 전해진다.
 이리하여 황폐한 유다는 돌아올줄 모르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이웃에 있던 모암, 암몬, 모압 등 이방인들이 주인처럼 유다에 거하게 되었다. 여기에 남아있던 소수의 유다인은 결혼을 계속하여 잡종 사회가 되었다.

(3)바벨론 포로 생활(기원전587-539년)
 바벨론에 포로가 된 유다 백성은 30년 40년이 가는 동안 비교적 자유로이 살면서 (겔8:1-1,14:4,20:1) 일부의 지식층들은 귀국하기를 고대했다. 그러면서도 2세에 대한 신앙교육을 착실히 하였으며 잡혼도 하지 않았으며 에스겔의 예언을 믿고 있었다.(겔37장) 이때 회당제도가 생겼다.

(4)포로에서의 귀환(기원전539-458년)
 유다 민족을 포로로 삼았던 갈대아(신바벨론) 제국이 기원전539년 바사왕 고레스에게 멸망당하자 고레스는 즉위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미 약속하신(렘29:10)대로 유다민족에게 해방을 선포했다. 관대한 고레스왕은 자기가 섬기던 아후라 마즈다 신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허용했다. 해방선포와 함께 유다에는 세스바살로 통치케 했는데 이는 바사의 제5관구에 속하였다.
 본토에 도착한 유다인들은 먼저 성전을 건축하려 했으나 그곳에 남아있던 자들의 방해로 시간이 지체되었고(스4:1-45:1-6:22) 이때 학개와 스가랴선지자는 기원전 520년경 성전재건이 지체되는 것을 책망하고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예수아)에게 재촉하여 다리오왕의 조서가 발표되어(스5:6) 기원전515년 예루살렘 성전을 준공하게 되었다.(스6:15)

(5)복구(기원전458-331년)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 이후 유다 지역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의해 종교생활의 복구운동이 일어났는데 느헤미야는 바사의 관리로부터 사회개혁 운동에 정치적 음모가 있다는 오해를 받고 바사로 소환되어 12년동안 수사에 머물렀다.(느13:6-8) 느헤미야의 소환으로 다시 유다 민족의 퇴보를 가져왔고 기원전433년 다시 유다로 돌아온 느헤미야는 철저한 복구운동을 재개했다. 말라기 선지자도 이때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4세기 동안 유다 지역은 모세의 율법과 대제사장들을 지도자로 모시고 어느 정도의 자치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뒤 비록 초라하기는 하지만 기원전331년 알렉산더가 바사를 차지할 때까지 별다른 변화없이 지냈다.(46페이지로)           

☞특수문자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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